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아무렇지 않은 척을 언제부터 했는지 기억나세요.

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기본이 되어 있었어요. 힘들어도 표정이 안 변하고, 당황해도 목소리가 안 흔들립니다.

주변에서는 무던하다고 합니다. 잘 버틴다고요. 그런데 정작 저는 지금 제가 괜찮은지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척은 원래 도구였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먼저 짚고 싶은 게 있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은 처음엔 필요해서 만든 도구입니다.

회의에서 감정을 드러내면 손해라서. 가족 앞에서 무너지면 다들 힘들어지니까. 아직 신뢰를 못 쌓은 곳에서 흔들리면 평가로 남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약해서 생긴 습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버텨내기 위해 잘 만들어낸 기능에 가까워요. 실제로 그 덕에 지나온 일들이 있고요.

그런데 오래 하면, 도구가 기본값이 됩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문제는 도구를 너무 오래 쓰면 켜고 끄는 법을 잊는다는 겁니다.

처음엔 특정 자리에서만 썼는데, 어느새 어디서나 켜져 있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 사람 앞에서도, 혼자 있을 때도요.

이게 연기와 다른 지점이에요. 연기는 무대가 끝나면 내려옵니다. 그런데 습관이 된 척은 내려올 무대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켜져 있고, 그게 원래 내 얼굴처럼 됩니다.

제일 곤란한 건, 나까지 속는다는 겁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남을 속이는 건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속이는 건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척이 능숙해지면 내 상태를 확인하는 감각 자체가 무뎌집니다. 힘든지 아닌지를 매번 확인하지 않게 되거든요. 확인하면 티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깁니다.

  • 누가 진심으로 걱정해주면 오히려 불편하다
  • 울어야 할 상황인데 눈물이 안 난다
  • 그런데 아무 상관 없는 드라마 장면에서는 운다

감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정문이 잠겨서 뒷문으로 나오는 겁니다.

척은 없애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여기서 흔한 조언은 솔직해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잘 안 됐어요. 척이 필요한 자리는 여전히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척을 없애는 게 아니라, 척을 안 하는 자리를 하나 정하는 것.

  • 퇴근하고 차에 앉아 있는 5분
  • 잠들기 전 침대에서 딱 세 줄
  •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 노트 하나

중요한 건 장소나 시간을 정해두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솔직해지자고 하면 아무 때도 안 됩니다. 그런데 자리가 정해져 있으면 몸이 거기서 풀려요. 여기선 안 해도 된다는 걸 아니까요.

필요한 자리와 아닌 자리를 나눠보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그리고 한 가지 더 해보시면 좋겠어요. 척이 필요한 자리와 아닌 자리를 종이에 나눠 적어보는 것.

왼쪽엔 정말 필요한 곳. 회의, 거래처, 아직 안 친한 사람들.
오른쪽엔 사실 안 해도 되는 곳. 오래된 친구, 혼자 있는 방, 이해해줄 가족.

해보면 대개 이런 걸 발견합니다. 오른쪽에서도 하고 있다는 것.

습관이라 구분 없이 켜져 있는 거예요. 그걸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달라집니다. 최소한 어디서 끌 수 있는지는 알게 되니까요. 전부 벗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 군데만 벗어도 숨 쉴 자리가 생깁니다.

정리하면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 아무렇지 않은 척은 약해서가 아니라, 버티려고 잘 만들어낸 도구
  • 오래 쓰면 켜고 끄는 법을 잊는다. 연기와 달리 내려올 무대가 없다
  • 제일 곤란한 건 나까지 속는다는 것. 감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뒷문으로 나온다
  • 척을 없애려 하지 말고, 척을 안 하는 자리를 하나 정한다
  • 필요한 자리와 아닌 자리를 나눠 적으면, 안 해도 되는 곳에서도 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다만, 이걸로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 습관이 된 사람
  • 잠이 계속 안 오거나 반대로 계속 자게 되거나
  • 먹는 게 어렵거나
  • 씻고 청소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이 안 되거나
  •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이런 상태라면 기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전문가를 만나는 게 맞습니다. 기록은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지, 치료가 아닙니다.

저는 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냥 말할 데가 없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 저는 이름 없는 숲이라는 익명 기록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평가도 없이, 그냥 적어두기만 하는 곳입니다.
척을 안 해도 되는 자리 하나로 쓰셔도 됩니다.
https://nameless-forest.com/ko?utm_source=naver&utm_campaign=pretending-is-a-hab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