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몇 달 쓰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옵니다. 어, 이거 저번에도 썼는데.
같은 사람 얘기, 같은 고민, 같은 문장. 지난달에도 썼고 지지난달에도 썼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죠. 나 지금 제자리인가.
그래서 기록을 그만두게 되는 분도 있습니다. 써봤자 똑같으니까요.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신호입니다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리고 싶어요. 같은 얘기가 반복되는 건 기록이 실패한 게 아닙니다.
뇌는 끝나지 않은 일을 계속 띄웁니다. 처리가 끝난 건 조용해지고, 안 끝난 건 계속 올라와요. 그러니까 같은 주제가 계속 나온다는 건 그게 아직 안 끝났다는 신호입니다.
기록이 그걸 만들어낸 게 아니라, 원래 계속 돌고 있던 걸 기록이 보이게 만든 것뿐이에요. 안 썼으면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반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반복이 다 같은 반복은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아직 안 끝난 일. 결정을 못 내렸거나, 해야 할 말을 안 했거나, 정리해야 할 관계가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둘째, 이미 끝났는데 감정만 남은 일. 상황은 종료됐는데 마음이 아직 따라가지 못한 경우예요. 헤어졌거나, 그만뒀거나, 떠나보냈거나.
이 둘은 필요한 게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다루니까 계속 제자리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구별하는 방법은 질문 하나입니다
어느 쪽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나."
있으면 첫 번째, 안 끝난 일입니다. 없으면 두 번째, 감정만 남은 일이고요.
이 질문이 좋은 건 답이 대체로 바로 나온다는 겁니다. 몇 달째 같은 얘기를 쓰면서도 이 질문을 한 번도 안 해본 경우가 많아요. 계속 감정만 적고 있었으니까요.
안 끝난 일이면, 결정 문장으로 바꿉니다
할 수 있는 게 있는 쪽이라면, 감정을 또 적는 대신 결정 문장 하나로 끝내보세요.
"그래서 나는 이번 주에 ○○를 하기로 한다."
중요한 건, 아직 결정 안 하기로 하는 것도 결정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결정하지 않기로 한다. 다음 달에 다시 본다."
이렇게 적어두면 뇌가 그 일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끝나지 않아서 계속 올라오던 거니까, 언제 다시 볼지 정해두면 그때까지는 조용해져요. 미루는 게 아니라 자리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감정만 남은 거면, 날짜를 세어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는 쪽이라면, 반복을 멈추려 하지 마세요. 그건 애도에 가깝고, 애도는 원래 여러 번 지나가야 합니다. 한 번에 정리되는 게 이상한 겁니다.
대신 이걸 해보세요. 같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옆에 날짜만 적어두는 것.
그러면 몇 달 뒤에 이런 게 보입니다. 이 얘기가 여섯 번 나왔는데, 처음엔 사흘 간격이었고 지금은 삼 주 간격이구나. 내용은 비슷해 보여도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게 회복 중이라는 증거입니다.
반복이 데이터가 되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제자리가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 같은 얘기가 반복되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 일이 아직 안 끝났다는 신호다
- 반복은 두 종류다. 아직 안 끝난 일 / 끝났는데 감정만 남은 일
- 구별법은 질문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나"
- 있으면 감정 말고 결정 문장으로. 지금은 결정 안 하기로 한다, 도 결정이다
- 없으면 멈추려 말고 날짜를 적어둔다. 간격이 벌어지면 회복 중이라는 증거다
다만, 이걸로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 잠이 계속 안 오거나 반대로 계속 자게 되거나
- 먹는 게 어렵거나
- 씻고 청소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이 안 되거나
-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이런 상태라면 기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전문가를 만나는 게 맞습니다. 기록은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지, 치료가 아닙니다.
저는 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냥 말할 데가 없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 저는 이름 없는 숲이라는 익명 기록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평가도 없이, 그냥 적어두기만 하는 곳입니다.
같은 얘기를 몇 번 써도 아무도 지겨워하지 않는 곳입니다.
https://nameless-forest.com/ko?utm_source=naver&utm_campaign=writing-the-sa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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