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펴놓고 이렇게 생각한 적 있으세요. 오늘 아무 일도 없었는데.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이요. 그냥 출근하고, 밥 먹고, 퇴근하고, 유튜브 보다 잔 날. 쓸 게 없어서 그냥 덮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보면 그런 날이 제일 많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날이 기록에서 빠지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판단입니다
먼저 짚고 갈 게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 판단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기준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쓸 만한 일 = 사건이 있었던 일. 싸웠거나, 잘렸거나, 좋은 소식이 있었거나. 그 기준에 안 걸리면 아무 일 없는 날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일기는 사건 기록이 아니라 상태 기록입니다. 사건이 없었어도 상태는 항상 있어요. 오늘 몸이 어땠는지,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었는지는 사건과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무난한 날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이유
그리고 하나 더. 무난한 날은 기억에도 잘 안 남습니다.
기억은 감정이 붙은 것부터 저장하거든요. 크게 화났던 날, 크게 기뻤던 날은 몇 년이 지나도 떠오릅니다. 반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화요일은 사흘만 지나도 사라져요.
그러니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기억에 붙잡힐 만큼 감정이 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건 나쁜 게 아닙니다. 오히려 평온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기록이 진짜 필요한 건 이런 날입니다
여기서 뒤집히는 게 있어요. 기록이 정말 필요한 건 무난한 날입니다.
힘든 날은 안 써도 기억에 남습니다. 오히려 너무 남아서 문제죠. 그런데 무난한 날을 안 쓰면, 나중에 내 기록을 펼쳤을 때 나쁜 날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 내 삶이 어땠는지와 상관없이, 기록만 보면 계속 힘들었던 사람이 됩니다. 무난한 날을 적어두는 건 그 착시를 막는 일이에요.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평소가 어땠는지를 알아야 안 좋아진 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기준선이 없으면 지금이 평소보다 나쁜 건지, 원래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기준선 문장을 남기세요
그래서 무난한 날엔 감정을 짜내려 하지 마세요. 대신 기준선을 적으면 됩니다.
"오늘은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럭저럭이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억지로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돼요.
여기에 한 줄만 더하면 좋습니다. 지금 몸이 몇 점쯤인지, 마음이 몇 점쯤인지. 숫자여도 되고 단어여도 됩니다. "몸은 보통, 마음은 살짝 무거움" 이 정도면 돼요.
이게 나중에 비교할 기준이 됩니다. 두 달 뒤 힘든 날에 이걸 보면, 지금이 평소보다 얼마나 내려간 건지 알 수 있어요.
그래도 안 떠오르면, 세 가지만 물어보세요
그럭저럭이었다도 안 써질 만큼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땐 사건 말고 흔적을 물어보세요.
- 오늘 뭘 먹었나 — 챙겨 먹었는지, 대충 때웠는지
- 오늘 누구랑 말했나 — 아무하고도 말 안 한 날인지
- 시간이 제일 빨리 간 순간은 언제였나 — 뭘 할 때 시간이 사라졌는지
이건 답하기 쉽습니다. 기억을 뒤질 필요 없이 그냥 대답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세 개를 한 달쯤 모으면, 사건보다 훨씬 정확하게 내 상태가 보입니다. 밥을 대충 때운 날이 늘고 있다면 그게 신호거든요.
정리하면
-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판단이다. 사건이 없었을 뿐 상태는 있다
- 무난한 날은 감정이 약해서 기억에도 안 남는다. 그래서 안 쓰면 정말 사라진다
- 기록이 진짜 필요한 건 무난한 날이다. 안 쓰면 기록에 나쁜 날만 남는다
- 무난한 날엔 기준선 문장 하나. "오늘은 그럭저럭이었다" + 몸·마음 상태 한 줄
- 그것도 안 되면 뭘 먹었나 · 누구랑 말했나 · 시간이 언제 빨리 갔나 세 가지만
다만, 이걸로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 잠이 계속 안 오거나 반대로 계속 자게 되거나
- 먹는 게 어렵거나
- 씻고 청소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이 안 되거나
-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이런 상태라면 기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전문가를 만나는 게 맞습니다. 기록은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지, 치료가 아닙니다.
저는 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냥 말할 데가 없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 저는 이름 없는 숲이라는 익명 기록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평가도 없이, 그냥 적어두기만 하는 곳입니다.
"그럭저럭이었다" 한 줄만 적어도 되는 곳입니다.
https://nameless-forest.com/ko?utm_source=naver&utm_campaign=nothing-happened-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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