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꾸준히 하는데, 예전에 쓴 걸 열어보는 건 못 하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몇 줄 읽다가 창을 닫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하루 종일 가라앉습니다.
저도 그랬고, 한동안은 "이럴 거면 왜 쓰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고 나니 다르게 다룰 수 있게 됐습니다.
쓴 나와 읽는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쓸 때 우리는 당사자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 힘든 게 당연하고, 그래서 판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는 관찰자가 됩니다. 밖에서 보는 위치죠. 이 자리에서는 평가가 붙습니다.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했네." "왜 이렇게 못났지."
같은 글인데 위치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괴로운 건 그 글이 못나서가 아니라, 읽는 자리가 원래 평가하기 좋은 자리여서입니다.
기록은 나쁜 날에 몰려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 단순합니다. 우리는 힘들 때 훨씬 자주 씁니다.
괜찮은 날엔 굳이 안 씁니다.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마음이 복잡한 날엔 어떻게든 꺼내놓게 됩니다.
그러니 기록 전체를 펼치면 나쁜 날만 모아놓은 앨범처럼 보입니다. 실제 내 삶이 그랬던 게 아니라, 기록이 남는 조건 자체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 "내 인생이 이 정도였나" 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건 기록이 알려준 사실이 아니라 표본이 만든 착시입니다.
안 읽어도 기록은 작동합니다
여기서 제일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다시 읽는 건 의무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쓰면 나중에 읽어봐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기록의 효과는 대부분 쓰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머릿속에서 뭉쳐 있던 게 문장이 되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게 본체입니다.
읽는 건 보너스입니다. 보너스가 괴로우면 안 받아도 됩니다. 한 번도 안 읽은 기록도 제 몫을 다 한 기록입니다.
그래도 읽고 싶다면, 규칙 두 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땐 두 가지만 지키시면 훨씬 낫습니다.
① 최소 2주 지난 것만. 어제 쓴 건 아직 감정이 붙어 있어서 그대로 다시 맞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야 관찰자 자리가 편해집니다.
② 한 번에 하나만. 스크롤을 내리면서 몰아 읽는 게 제일 위험합니다. 나쁜 날이 연속으로 지나가면서 "계속 이랬구나"라는 잘못된 결론이 만들어집니다.
고치지 말고, 한 줄만 덧붙이세요
그리고 읽을 때 하는 일을 바꿔보시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은 읽으면서 평가를 합니다. 그때 왜 그랬을까, 지금 보니 별것도 아닌데.
대신 이렇게 해보세요. 그때 내게 필요했던 말을 한 줄 아래에 덧붙이는 것.
- "그날은 잠을 세 시간밖에 못 잤다"
-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이상했던 거다"
- "이 일은 결국 두 달 뒤에 정리됐다"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짧은 답장 같은 거예요. 이렇게 하면 읽기가 재판이 아니라 대화가 됩니다. 판단하러 가는 게 아니라 뭘 좀 주러 가는 게 되니까요.
정리하면
- 다시 읽기가 괴로운 건 글이 못나서가 아니라 읽는 자리가 평가하기 좋은 자리여서다
- 우리는 힘들 때 더 자주 쓴다. 그래서 기록 전체는 나쁜 날로 기울어진 표본이다
- 다시 읽는 건 의무가 아니다. 기록의 효과는 대부분 쓰는 순간에 일어난다
- 읽는다면 최소 2주 지난 것 · 한 번에 하나만. 몰아 읽기가 잘못된 결론을 만든다
- 평가하지 말고 그때 필요했던 말을 한 줄 덧붙인다. 재판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다만, 이걸로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 잠이 계속 안 오거나 반대로 계속 자게 되거나
- 먹는 게 어렵거나
- 씻고 청소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이 안 되거나
-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이런 상태라면 기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전문가를 만나는 게 맞습니다. 기록은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지, 치료가 아닙니다.
저는 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냥 말할 데가 없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 저는 이름 없는 숲이라는 익명 기록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평가도 없이, 그냥 적어두기만 하는 곳입니다.
다시 안 읽어도 되는 곳입니다.
https://nameless-forest.com/ko?utm_source=naver&utm_campaign=rereading-hu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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