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락 온 사람이 잘 지내냐고 물었는데, 답장을 못 보낸 적 있으세요.
거짓말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안 좋다고 하면 설명을 해야 하고. 그러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 이제는 답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이상한 건, 몇 달 전엔 이 질문이 안 어려웠다는 겁니다.
"잘 지내?"는 사실 질문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 짚고 갈게요. "잘 지내?"는 질문처럼 생겼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사입니다.
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 너를 생각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영어의 How are you와 비슷합니다. 아무도 진짜 상태를 보고받으려고 그 말을 하지 않죠.
그런데 우리는 그걸 질문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답하려다 막히는 거예요.
한 단어 답을 전제로 설계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답의 길이가 이미 정해져 있어요.
- 응, 잘 지내
- 그럭저럭
- 요즘 좀 바빠
한 단어나 한 문장. 그게 이 질문이 기대하는 크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상태는 그 크기에 안 들어갑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아니고. 이걸 한 단어로 줄이면 뭘 골라도 거짓말이 돼요. 줄이는 과정에서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아직 결론이 안 난 상태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요. 요약은 끝난 일에만 가능합니다.
일이 끝났으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잘 마무리됐다, 처럼요. 그런데 지금 진행 중인 일은 요약이 안 됩니다. 결말을 모르니까요.
- 회사를 계속 다닐지 아직 모르겠고
- 그 사람과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 이게 지나갈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진행 중인 걸 요약하라니까 막히는 겁니다. 말솜씨가 없어서도, 감추려는 것도 아니에요. 아직 문장이 될 수 없는 상태인 거죠.
답하기 어려워진 것 자체가 신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이 어려워진 게 아니라 내가 복잡해진 겁니다.
잘 지낼 때는 이 질문이 안 어렵습니다. 요약이 쉬우니까요. 답이 막힌다는 건 지금 내 안에 정리 안 된 것이 많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답장을 못 보내고 있는 것도 예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걸 알면 최소한 답을 못 하는 자신을 탓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나. "잘 지내"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인사에 인사로 답한 것뿐이에요. 상대도 대부분 그 정도를 기대합니다. 여기에 죄책감을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 진짜 말하고 싶을 땐 요약하지 말고 조각 하나만 주세요. "요즘 일이 좀 많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전체를 설명하려니까 시작을 못 하는 거예요. 조각 하나면 상대도 받을 수 있고, 더 묻고 싶으면 묻습니다.
셋. 남에게 답하기 전에 나부터 나열해보세요. 요약하지 말고 그냥 목록으로요. 지금 마음에 걸리는 것 다섯 개. 순서도, 크기도 신경 쓰지 말고요.
한 줄 요약을 시도하는 순간 또 막힙니다. 나열은 진행 중인 상태에서도 됩니다. 그리고 적어놓고 보면 대개 알게 돼요. 실제로 걸리는 건 그중 한두 개였다는 걸요.
정리하면
- "잘 지내?"는 질문이 아니라 인사다. 질문으로 받으니까 막힌다
- 이 질문은 한 단어 답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지금 상태는 그 크기에 안 들어간다
- 요약은 끝난 일에만 가능하다. 진행 중인 건 아직 문장이 될 수 없다
- 답하기 어려워진 건 말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 "잘 지내"는 거짓말이 아니다. 인사에 인사로 답한 것이다
- 진짜 말하고 싶을 땐 요약 말고 조각 하나. 나한테는 요약 말고 나열
다만, 이걸로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 잠이 계속 안 오거나 반대로 계속 자게 되거나
- 먹는 게 어렵거나
- 씻고 청소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이 안 되거나
-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이런 상태라면 기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때는 전문가를 만나는 게 맞습니다. 기록은 마음을 정리하는 도구지, 치료가 아닙니다.
그리고 연락을 못 받는 상태가 몇 달째 이어지고 사람을 아예 안 만나게 됐다면, 그것도 도움을 받으실 신호입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지금 여력이 없는 겁니다.
저는 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냥 말할 데가 없어본 적 있는 사람입니다.
🌲 저는 이름 없는 숲이라는 익명 기록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댓글도 평가도 없이, 그냥 적어두기만 하는 곳입니다.
요약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https://nameless-forest.com/ko?utm_source=naver&utm_campaign=hard-to-answer-how-are-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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